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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 戰爭時 韓國軍의 撤收決定過程
    글쓴이 : 최상영 작성 : 2005.06.26 조회 : 5,148
    Document
    베트남 戰爭時 韓國軍의 撤收決定過程
    2005/05/28 오전 2:17 l Document
    베트남 戰爭時 韓國軍의 撤收決定過程
    李 美 淑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
    1. 序 論
    1964년 한국군의 베트남참전은 건군이래 최초의 해외파병으로, 한국현대사 전반에 영향을 미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런 이유로 한국군의 베트남 참전에 대한 연구는 정치, 외교, 경제, 역사, 군사 등 제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한국의 베트남 참전에 관한 기존의 연구는 4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그것은 베트남전 파병 결정요인, 베트남 파병의 영향, 베트남 파병의 결정과정, 베트남 전사이다. 첫째, 베트남 파병 결정요인에 대한 연구는 한미관계에 대한 논의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한승주는 한국군의 파병은 한·미간의 역학관계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김기태는 베트남 파병원인을 한미관계의 군사·안보적 측면에서 분석하였다. 홍규덕은 파병당시 한국사회의 경제개발 요구와 자발적 의지를 참전동인으로 분석하였다. 이기종은 베트남전 참전 결정요인으로 국내의 정치적 환경을 최우선시 하였다. 이외에 참전원인을 군사적인 측면에서 연구한 저술도 있다.
    둘째, 베트남 파병의 영향에 대한 연구이다. 나종삼은 파병의 영향을 정치, 외교, 군사, 경제분야로 구분하여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분석하였는데, 특히 파병이 군사분야에 미친 영향을 중시하였다. 한국의 베트남 참전을 최초로 다룬 김세진은 참전을 통해 한국의 경제적 여건과 외교적 지위가 향상되었고, 박정희 정부의 정치적 입지도 강화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유윤식은 제6·7대 국회의원 선거결과 비교를 통해 군사정부가 베트남 파병으로 국민의 지지를 얻어 정치기반이 강화되었다고 분석하였다. 박근호는 현대 한국경제의 발전은 베트남 특수를 창출한 베트남 참전의 결과라며 참전의 경제적 영향을 강조하였다.
    셋째, 베트남 파병의 결정과정에 대한 연구는 장재혁의 논문이 대표적이다. 그는 4차에 걸친 파병결정 과정에서 대통령을 중심으로 하는 행정부와 국회의 상호작용을 분석하여 베트남 파병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정책결정과정을 유형화하였다.
    넷째, 베트남전쟁에 대한 전사 연구는 1980년 이후 진행되었지만 현재까지 크게 진전을 보지 못했다. 대표적으로 전사편찬위원회와 위태선의 연구를 들 수 있는데, 전쟁기간 중의 작전과 지역별 전투사를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최근에는 구술전사 차원에서 베트남전쟁의 실상과 전술전기를 새롭게 조명한 최용호의 연구가 나왔다.
    이러한 연구들은 한국군의 베트남전 파병 결정요인, 베트남 참전 영향 등의 이해에 그치지 않고 정치·외교·안보·경제적 성과와 외국과의 협상과정에서 나타난 한국군의 자주적 측면을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연구사적으로 의의가 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본고에서 다루려는 베트남전의 한국군 철수 문제는 여전히 연구자들의 관심 밖에 있다.
    그러나 베트남전의 한국군 철수에 대한 연구는 베트남 참전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다. 베트남 참전원인과 파병결정과정, 영향 등 기존 연구성과는 철수분야의 연구를 통해 총체적으로 접근될 때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베트남 참전의 전 과정을 마무리한 철수과정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그 동안 베트남 파병에 편중되어 연구가 부진했던 베트남 철수과정을 한국군의 자주적인 측면에서 다뤄보고자 한다. 본고는 크게 두 가지 면에 중점을 두었다.
    첫째, 군의 자주적 노력을 주월한국군의 제2단계 철수 과정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주월한국군이 철수결정 과정에서 철수방침의 조정을 건의하고, 이에 국방부가 최종방침을 결정하는 과정과 미국·베트남과 철수관련 실무를 협의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밝혔다.
    둘째, 철수결정 과정 중에 군이 고려한 요인을 당시 국방부와 주월한국군사령부의 생산문서를 토대로 분석하였다.
    그리하여 베트남 참전에서 군의 역할을 재조명함으로써 베트남전쟁의 올바른 이해와 향후 한국 해외파병사의 연구에 도움이 되고자 하였다.
    2. 撤收 背景과 決定 過程
    베트남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에도 계속된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지배와 이에 대항한 베트남의 항전이 케네디 대통령의 개입정책과 고 딘 디엠(Ngo Dinh Diem)의 남베트남 정부수립으로 남베트남에서 내전화되었고, '베트남 내전의 미국화'가 추진되면서 북베트남과의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베트남전이 확전되면서 미국의 봉쇄정책도 강화되었다.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이로 인해 주한미군의 베트남 전용(轉用)이 우려되는 상황 속에서 미국과 베트남 정부의 요청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미국은 1969년 후반부터 베트남전 개입에 대한 반성과 세계질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거론되자, 7월 '닉슨독트린'을 발표하였다. 미국은 '닉슨독트린'을 통해 미국의 힘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공동유대를 통하여 아시아에 대한 공약의 정도를 명확히 하였다. 즉,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제국에게 자국방위에 대한 책임을 분담시키고, 대(對)중·소 교섭으로 북베트남을 상대적으로 격리시켜 북베트남과 정전협정을 맺고자 하였다. 따라서 닉슨(Richard M. Nixon) 대통령은 '베트남전의 베트남화정책'을 추진하여 같은 해 7월부터 주월미군을 단계적으로 철수시키면서 북베트남과의 휴전협상을 진행시켰다.
    이처럼 미국의 대외정책이 변화되자 주월한국군의 철수문제도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자유우방국의 일원인 호주, 뉴질랜드, 태국 등 주월연합군은 1970년부터 철수를 서둘러 1971년말까지 철수를 거의 완료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5만명이나 되는 한국군은 아직 철수할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경제적 실리를 거두고 있던 한국정부로서는 주월한국군의 철수를 서두르지 않았다. 그리고 한국정부는 국군의 베트남파병으로 한·미간의 안보체제가 강화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에 적어도 한국군이 베트남에 잔류하는 동안에는 주한미군이 철수하지 않을 것으로 믿고 있었다. 하지만 1970년 7월 5일 사이공에서 열린 제4차 베트남 참전 외상회의에서 로저스 미 국무부장관으로부터 주한미군의 부분적인 철수를 통보받으면서 주월한국군의 철수를 주장하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박 대통령은 여러 경로를 통해 주한미군의 철수를 저지하고자 노력하였다. 박 대통령은 1970년 7월 호놀룰루 정상회담에서 주월한국군의 철수 가능성을 주한미군 철수에 대한 위협수단으로 제시하였으나 효과가 없었다. 결국 미국은 베트남에서의 진정한 평화보다는 베트남전을 종료하기 위한 적당한 명분만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과 협의없이는 주한미군을 감축 또는 철수하지 않겠다던 미국의 약속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정부는 한·미 안보유대의 끈이던 주월한국군의 철수를 단행함으로써 주한미군의 철수로 생긴 국가안보상의 공백을 메우고자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이세호(李世鎬) 주월한국군사령관은 1970년 11월 11일 철수문제를 공식적으로 거론하였다. 이세호 주월사령관은 현지정세 보고에서 "한국군도 1971년부터 1974년 사이에 철수해야 할 추세에 있다"라고 보고하였다.
    긴장완화의 국제적 기운이 성숙해가고 있음을 예견한 대통령은 이세호 주월사령관의 베트남정세보고와 국방부 합참전략정보국의 정세판단보고 및 국내·외의 여론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이세호 사령관의 철수제안을 수용하였다. 박 대통령은 1971년 1월 11일 연두기자회견을 통해 "베트남사태의 악화로 우리만 계속 철수하지 않고 머무르고 있다는 것은 국내 정치적으로나 국제 여론상으로도 좋은 방법이 아니며 외화 수입을 고려해서는 장기주둔이 유리하나 일부병력의 철수는 무방하다" 따라서 "주월한국군의 단계적 감축을 검토하고 있으며, 그 시기는 베트남정부 및 미국과 충분히 협의한 후 결정하겠다"라고 밝혔다. 이후 한국정부는 베트남정부와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과 충분한 협의를 거친 후 1971년 11월 6일 제1단계 철수계획을 발표하였다. 이로써 주월한국군의 제1단계 철수는 미국의 '베트남전의 베트남화정책'에 따라 시행된 자유우방군의 감축계획의 일환으로 1971년 12월 1일부터 1972년 4월 13일까지 시행되었다. 철수병력은 제2해병여단 및 제100군수사령부의 일부 병력과 기타 병력 등 9,476명이었다.
    제2단계 철수문제는 1971년 11월 6일 박 대통령이 제1단계 철수계획을 발표한 담화문에서 "즉시 관련국과의 협의를 통해 추진하겠다"고 언급되었으나 정부는 주월한국군 잔여병력을 1972년 중에 조기 철수한다는 기본방침을 세우고 이미 10월 8일부터 제1차 한·미 군사실무자 회의를 개최하여 철수에 따른 현안문제를 협의하기 시작하였다.
    국방부도 10월 15일부로 [제2단계 철수계획 수립 준비지시]를 내린 상태였다. 철수를 시행하는 당사자인 주월한국군은 "1972년 중에 조기 철수한다"는 정부의 철수방침을 접수한 후, 제2단계 개선문계획을 수립하여 1971년 11월 26일 국방부에 보고하였다. 주월사령부는 "베트콩 및 북베트남의 전투력이 현수준을 능가하지 않을 것이고, 베트남군은 '베트남화계획'에 따라 계속 증강될 것이므로 베트남정부는 베트남전을 단독으로 수행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주월한국군과 주월미군을 제외한 자유우방군은 1971년말 혹은 1972년초까지 전투부대의 대부분을 철수시킬 것이고, 주월미군의 철수가 계속되면 1972년 이후 잔류부대는 대부분 전투지원 및 근무지원부대로 이루어진다는 판단하에 주월사령부는 철수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1971년 12월 17일, 제2단계 철수를 준비중이던 주월한국군사령부는 국내·외정세의 변화에 따라 부득이하게 제2단계 개선문계획 기본방침의 수정을 건의하였다. 주월한국군사령부는 정부가 1972년말까지 전 주월한국군을 철수하기로 결정한 제2단계 철수계획을 우선 베트남정부와 미국정부에 정식통고하여 이에 대한 미국·베트남정부의 공식적인 반응을 살피자고 하였다. 그런 다음 미국·베트남 양국이 주월한국군의 철수연기를 공식적으로 강력히 요청해 오면 미국이 '한국정부의 3가지 제안'을 수락한다는 조건으로 기본방침을 수정하자는 것이었다. 주월한국군사령부가 미국에게 제시한 내용은 첫째, 주한 미 지상군 1개 사단을 포함한 현 수준의 주한미군과 유엔군사령부의 존속, 둘째, 기 협의된 한국군현대화계획의 보장과 촉진, 셋째, 잔류하는 한국군에 대한 원활한 전투지원 및 군수지원을 위한 군사실무약정서의 수정 및 보완이었다. 주월한국군사령부는 2개의 조정안을 제시하였다. 제1안은 1개 전투사단을 계획대로 1972년 12월말까지 철수하고 1개 전투사단은 1973년 6월말까지 잔류하되 국내·외 여건을 감안하여 철수하자는 것이고, 제2안은 2개 사단 모두 1972년 말까지 잔류하고 1973년 1월부터 철수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월한국군사령부의 건의는 불확실한 국제환경 속에서 주월군의 철수 연기를 통해 미국으로부터 국가안전을 확보하려는 하나의 조치였다. 주한미군 7사단이 철수한 상황에서 주한미군이 계속적으로 철수하는 것은 한국의 안보에 큰 위협이 되므로 주한미군의 계속적인 주둔을 위해서 1972년말까지로 되어 있는 주월한국군의 철수를 연기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국방부는 12월 21일 주월대사를 통해 트란 반 람(Tran Van Lam) 베트남 외무부장관에게 군사실무자 회의를 제의하는 한편 군수뇌부 인사들을 베트남에 보내 현지정세와 군사정세 및 정부의 철수 기본방침에 대한 베트남정부의 반응을 면밀히 살폈다.
    1972년 1월 10일 베트남을 방문한 서종철(徐鍾喆) 육군참모총장은 군사당국자들과 '베트남화계획'에 따른 베트남군의 전투력 증강과 평정계획의 진도 및 베트남의 군사정세 등을 검토하였다. 서 총장은 검토 결과 베트남은 평정계획의 성공으로 정세가 안정되고, '베트남화계획'의 추진으로 베트남군이 증강되어 군사정세가 호전되었으며, 주월미군이 철수를 가속화하는 가운데 기타 연합군도 완전히 철수한 상태라고 보고하였다. 이에 근거하여 국방부는 "주월한국군의 전 병력을 1972년말까지 철수한다"는 최초 방침을 기본입장으로 결정하였고, 외무부는 1972년 1월 19일 주한 베트남대사와 주한 미대사를 통해 이러한 기본 입장을 통고하였다.
    이에 대해 하비브(Philip C. Habib) 주한 미대사는 1972년 1월 25일 청와대를 방문하여 박 대통령에게 주월한국군의 잔여병력 철수를 1972년말까지 연기해 줄 것을 정식으로 요청하였고 베트남 정부는 1973년말까지 계속 주둔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미국·베트남 양국의 철수연기 요청에 따라 심흥선(沈興善) 합참의장이 1972년 1월 28일과 29일 양일간 베트남을 방문하여 베트남의 현지정세와 군사정세 및 정부의 철수 기본방침에 대한 베트남정부의 반응을 재차 살폈다. 심흥선 합참의장은 국방부장관에게 "주월한국군에 대한 안전보장책만 강구된다면 미국의 연기 요청을 받아들이자"고 건의하였다. 국방부는 1972년말까지 잔류하여도 무방하다는 판단하에 차제에 미국의 요청을 수락함으로써 대미안보관계에 있어서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 한국군현대화계획 추진 등에서 우리의 입장을 최대한 반영시키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유재흥(劉載興) 국방부장관은 미국정부에 "닉슨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및 소련 방문 등 일련의 중요한 시기를 감안하여 주월한국군을 1972년 5월까지는 철수시키지 않으며, 주월한국군의 안전과 한국에 대한 국제적 여론의 순화가 보장된다면 1972년말까지 주둔을 고려할 수 있다"고 통고하였다. 아울러 유재흥 장관은 2월 4일 주한 유엔군사령관에게 주월군의 안전보장 6개 사항을 요구하는 서한을 발송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방부는 2월 5일 제2단계 개선문계획에 관한 훈령을 지시하여 1972년말까지의 잔류에도 대처하였다.
    1972년 2월 8일에는 유재흥 국방부장관이 주월한국군 2단계 철수에 관한 한국정부의 기본방침을 전달하고, 한국군의 베트남지원 문제를 비롯하여 미·북베트남 평화협상 진전에 따른 한국군의 철수시기 등 현안문제와 동남아사태에 대해 협의하고자 베트남을 방문했다. 유재흥 장관은 10일 구엔 반 베(Nguyen Van Be) 베트남 국방부장관과의 회담에서 "적의 공세가 예상되므로 한국군 2개 전투사단을 1973년말까지 계속 주둔시켜 달라"는 요청에 대해 "북한의 도발에 의한 정세악화로 국내 안보상의 요구가 있기는 하나, 2개 전투사단을 1972년 12월까지 계속 주둔시킬 예정이며, 이를 위해서는 미군 2개 전투여단 이상의 계속 베트남주둔, 현수준의 항공지원 및 연대급 작전에 소요되는 헬기지원, 기타 군수지원의 계속 등 몇가지 조건이 해결되어야 하는 바 지금 미국과 교섭하고 있으므로 베트남도 측면에서 지원해 주기 바란다"고 답변했다. 이에 대해 베트남 국방부장관은 한국정부의 입장을 이해하고 대미교섭에 있어 공동보조를 취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러나 티우(Nguyen Van Thieu) 대통령은 11일 유재흥 국방부장관이 예방한 자리에서 주월한국군을 1973년말까지 잔류시켜 줄 것을 재차 강력하게 요청하였다. 이에 대해 유 장관은 북한의 전쟁준비 상황과 공격 가능성 및 한국군현대화계획의 지연 등을 설명하고, "한국군을 1972년 5월말까지는 잔류할 계획이나 주월한국군의 안전보장이 해결되는 경우에 한해서 1972년말까지 잔류하겠다고 미국정부와 교섭 중이므로 베트남 정부의 협조를 희망한다"고 답변하였다.
    유 장관은 2월 16일 베트남공화국 방문결과 보고에서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베트남적화 기본목표와 전략에는 변화가 없으며 새로 제안된 협상안에 의한 현상타개 또한 매우 곤란한 실정에 있는 현재, 적은 일대공세의 호기를 노리고 있으므로 향후 4∼5개월내에 피아간에 일대격전이 예상되고 있으며, 그 결과는 베트남전 종식을 위한 새로운 국면을 가져 올 것으로 분석하였다. 그러나 미 공군력에 의한 강력한 화력지원이 보장되고, 상당한 평정지역을 담당하는 한국군이 최소 1972년말까지 잔류하고, 베트남이 막대한 군사력을 유지하며 전후 복구 등 경제적 능력 향상에 필요한 미국의 원조가 수년간 계속 된다면 베트남의 장래는 희망적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주월군의 철수는 미·베트남 양국의 정세를 감안하여 1972년 12월부터 6개월간에 시행할 것을 전제로 하여 계획을 수립하여 실행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고하였다.
    또한 기자회견에서 유 장관은 미국으로부터 주월한국군 안전보장에 대한 긍정적인 답변이 올 것으로 기대하면서 제2단계 철수계획을 3월말까지 매듭짓겠다고 언급하였다. 그러나 주월미군사령관은 유 장관의 제안에 대해 일절 언급을 회피하였다. 다만, 철수에 따른 수송계획 등 한·미간의 원만한 협조를 위해 3개월 이전에 주월한국군의 철수계획을 통고해 줄 것을 당부했다. 당시 미국정부는 의회에서 국방예산의 대폭 삭감이 예상되므로 한국군 2개 사단에 대한 계속적 지원이 어려우며 만일 베트남정부가 계속 한국군의 잔류를 희망한다면 미국의 베트남화계획의 예산을 할애하지 않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의견차이로 철수계획은 지연되었다. 이에 국방부는 유재흥 장관의 베트남방문결과, 당시의 국내·외정세, 미국·베트남 양국의 정세 및 한국군의 안전보장 문제 등을 면밀히 검토 분석한 [제2단계 철군계획에 대한 연구]보고를 통해 "1972년말까지 주둔하고 1973년 전반기까지 철수하자"는 철수방침을 건의하였다.
    정부는 국방부의 건의와 외무부의 정세보고를 종합분석하여 주월한국군의 제2단계 철수방침을 결정하였다. 즉 정부는 인도차이나반도의 정세가 악화될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 미국은 계획대로 주월미군을 철수할 예정인데 한국군만 계속 잔류한다면 미군의 작전 및 군수지원이 감소한 가운데 적의 주목표가 되므로 위험하며, 자칫 잘못될 경우에는 국내여론을 부추겨 정치문제화 할 소지가 다분하다고 판단하여 국방부의 건의를 주월한국군의 제2단계 철수를 위한 정부의 방침으로 최종 확정하였다. 이에 따라 국방부는 7월 26일부로 국방부 훈령 72-140호를 지시하여 제2단계 철수를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이와 같이 최초 철수방침은 주월한국군사령부의 조정 건의와, 국방부의 수뇌부가 베트남방문을 통해 분석한 연구 결과를 토대로 변경되었다. 이로써 주월한국군의 철수는 1972년말까지 주둔한 뒤 1973년 1월부터 시행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3. 撤收 要因 分析
    당시 철수방침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거론된 철수방안은 3가지였다. 제1안은 한국정부의 최초 기본방침인 1972년말까지의 조기철수안, 제2안은 미국정부의 요구대로 1972년 말경까지 주둔하고 1973년 전반기까지 철수하는 안, 제3안은 베트남정부의 요구대로 1973년 말까지 주둔하는 안이었다. 국방부는 '한·미동맹관계의 강화와 자주적 방위태세의 확립'이라는 목표하에 국내·외여론, 한국군의 안전보장문제, 경제적인 요인, 대북관계, 대미관계, 대월관계 등을 고려요소로 삼아 종합적으로 분석한 결과 1973년 전반기 철수안을 최종 방침으로 결정하였다. 따라서 군이 철수 요인으로 고려한 요소들을 당시 국방부와 주월한국군사령부의 생산문서를 중심으로 분석해 봄으로써 군의 철수결정 과정을 구조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1) 국내·외 여론
    긴장완화라는 국제적 기운이 성숙해 가고 있음을 예견한 박 대통령은 1971년 1월 11일 연두기자회견에서 주월한국군의 단계적인 감축을 발표하였고 여야정당을 포함한 여론은 이를 환영하였다.
    이어서 11월 6일에는 "제1단계 철수로서 청룡부대와 십자성부대의 일부를 포함하는 약 1만명의 병력을 1971년 12월 1일부터 1972년 6월 30일 사이에 철수시킬 것"이라는 한국·베트남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박 대통령은 이날 특별담화에서 "나머지 병력의 철수문제도 베트남정부 및 기타 참전연합국 정부와 협의하여 시행해 나갈 방침이다"라고 정부의 방침을 명백히 하였다.
    따라서 국민들은 베트남에서의 여타 참전국의 철수에 발맞추어 주월군도 조만간에 철수하리라고 기대하였다. 국내여론도 "그 정도 했으면 우리의 명분은 다 했다. 주한미군이 감축된다면 주월한국군도 돌아와야 방위의 공백이 없지 않겠는가? 주월미군이 철수함에 따라 주월한국군에 대한 지원과 베트남특수를 통해 얻었던 외화수입도 차차 줄어들고 있다"는 등의 입장을 내세워 철수를 요구하였다. 국방부 합참전략정보국도 [주월한국군에 대한 각국 여론] 보고를 통해 일본, 영국, 태국, 브라질 등의 국가는 '닉슨독트린'에 의하여 주월미군의 철수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구태여 한국군만이 장기 주둔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나타냈다고 밝혔다. 그러므로 당시 주월한국군의 철수문제를 둘러싼 국내·외 여론에 순응한다면 1안을 선택하여야 했었다.
    정부도 안케패스(An Khe Pass) 작전이후 국내의 여론에 매우 민감해졌다. 주월한국군의 분전으로 안케패스 작전을 성공리에 마쳤으나 작전 당시 군이 감당해야 할 시련과 정부의 우려는 엄청났었다. 혹시라도 작전이 실패했다면 정부는 철수를 앞둔 시점에서 주월한국군의 파병에 대한 책임을 면키 어려웠을 것이다. 주월미군이 철수한 상황에서도 철수를 시행하지 않다가 한국군이 손실을 입게 된다면 국내여론에도 악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정치문제화할 소지가 있었기 때문에 정부는 긴장하고 있었다. 따라서 또 다른 작전 및 전투가 일어나기 전에 가능한 철수를 완료하고자 하는 바램도 있었다. 차후의 북베트남군과 접전을 하게된다면 고전을 면치 못할 상황으로 전개될 것이 자명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은 대미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미국의 일부 지상군이 잔류하고 있을 때까지는 국내·외 여론이 크게 악화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하에 2안을 결정했다고 판단된다. 3안의 경우는 국내·외적으로 호전국이란 인상을 주게 되어 우리의 입지를 약화시킬 수 있으며 북한을 자극할 수 있는 부정적인 측면이 농후하였다.
    (2) 한국군의 안전보장문제
    1968년 6월에 545,000여 명이던 주월미군은 1970년에 434,000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또한 전투부대를 파견한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태국 등 연합국도 이에 동조하여 병력을 철수하기 시작하여 1971년에는 거의 철수한 상태였다. 미군은 1972년 5월까지 69,000여 명이 잔류하였고, 미군의 철수계획에 따르면 12월 1일 이후에는 전투부대는 없고 군수지원 및 철수정리 요원 27,000여 명만 남게되었다.
    이에 비해 북베트남군은 4개 전투사단 병력을 17도 휴전선과 중부 2군구 지역에 집중하고, 1972년 1월중에 계획량의 241%에 달하는 유류를 도입 완료함으로써 베트남의 군사정세는 북베트남의 대공세가 임박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1안이 한국군의 안전보장에 가장 유리하였다. 당시 미군의 지원은 비교적 잘 이루어졌다. 그리고 미국이 북베트남과의 휴전협정 체결을 위한 준비단계로 주월미군을 철수시키면서 마지막 단계에 주둔해 있는 상황이므로 북베트남군이 섣불리 공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2안을 따른다면 주월미군의 철수가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한국의 철수방침이 북베트남에게 1안보다 불리하게 작용하므로 한국군에 대한 적의 위협은 더욱 증가될 것이었다. 특히 서부로부터 중부 고원지대로 침투한 적이 북부 3개성을 분쇄하기 위하여 대공세를 시도할 경우 맹호부대 지역이 공격의 주 대상이 될 상황이었다. 한국군은 미군의 전투지원과 군수지원이 열악한 상황에서 전투를 해야하므로 고전이 예상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우리에게 2안을 종용하였다.
    이에 대해 심흥선 합참의장은 베트남 방문결과를 토대로 주월한국군에 대한 안전보장책만 강구된다면 미국의 철수연기 요청을 받아들이자고 국방부장관에게 건의하였다. 국방부는 심흥선 합참의장의 제안을 받아들여 주월군 안전과 관련된 6개 사항을 미국정부가 보장한다면 주월군을 1972년말까지 잔류시키겠다고 밝혔다. 당시 주월한국군 안전보장에 대한 현지 실정은 <도표 1>과 같았다.
    <도표 1> 주월한국군의 안전보장에 대한 현지 실정
    이처럼 1972년 5월 이후의 철수계획은 미국의 주월한국군 안전보장 여부에 달려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1972년말까지 주월한국군의 잔류를 요청하면서도 주월한국군의 안전보장 문제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을 회피하였다. 미국은 주월한국군이 1972년말까지 잔류하길 바라면서도 우리의 요구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5월에 철수를 하게되면 3개월 이전까지 철수계획을 통보해 줄 것을 당부했다.
    한국군의 안전보장에 대한 미국의 확답을 받지 못한 채 철수결정 시간만 경과하는 가운데 3월말부터 북베트남군의 춘계 대공세가 시작되었다. 대공세 결과 미국은 전쟁지속능력을 소진한 북베트남을 협상테이블로 끌어냈고, 강력한 북폭을 병행하면서 베트남정세를 점차 회복시켜 나갔다. 외무부의 보고에 따르면 미국은 베트남이 합의하지 않더라도 북베트남과 연내에 협상타결을 강행할 추세였다.
    이렇게 되자 군은 주월한국군 안전보장 요구 수준을 조정하였다. 베트남정세가 현 상태 이상으로 악화되지 않는다면 북베트남군에 대비할 수 있는 긴요한 장비와 물자의 지원만 보장되어도 1972년말까지 잔류하는 것은 무방하다는 판단이었다. 그리하여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를 고려하여 1972년말까지 철수를 보류하고 1973년 초부터 조속한 시일내에 철수를 하겠다고 결정하였던 것이다.
    한편 3안은 재고의 여지가 없었다. 미국과 북베트남간에 휴전협상이 진행되고 있었으나, 베트남의 정세가 악화될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 미국은 '베트남화정책'을 추진하여 계획대로 주월미군을 철수할 것인데 한국군만 계속 잔류한다면 미군의 작전 및 군수지원이 감소한 가운데 적의 주목표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3) 경제적 요인
    한국정부가 한국군을 베트남에 파병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경제적 실리 추구였다. 정부는 전투병력 파월에 대한 대미협상을 시작하면서부터 국민이 납득할 만한 실리를 미국이 보장해 줄 것을 강력히 요청하여 '브라운각서'를 체결하였다. 정부는 '브라운각서'를 통해 군원이관의 중지, AID차관 제공, 한국상품의 대미수출 확대, 주월한국군에 소요되는 보급물자·용역·장비 등의 한국구매 등을 보장받았다. 또한 미국이 지원한 막대한 주월한국군의 유지 비용, 베트남전에 필요한 군수물자 납품 및 용역사업, 기업체의 진출 등의 베트남특수에 힘입어 1967년부터 1971년까지 연평균 1억 4,000만달러를 획득함으로써 경제발전에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외화획득과 외자도입에 힘입어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과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성공적을 끝내고 1972년에는 제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1년차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기철수를 감행한다면 외화획득이 감소하여 제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지장을 초래하고, 국민총생산도 줄어들며, 해외 수출도 감소하여 한국 경제에 적잖은 타격을 주게 될 것이었다. 또한 주월한국군의 철수에 따른 한국군의 실링 조정과 복귀부대의 재배치에 소요되는 추가적인 예산소요가 조기에 발생하는 부담이 있었다. 철수병력은 '72년도 국군 병력수준에 의해 철수단계별로 조정하여 60만을 초과하지 못하도록 감축 조정하였다(합작편 912-346/'72. 4. 15). 이에 따라 <도표 2>와 같이 철수 병력의 70%에 달하는 26,800명을 감축하여야 했다. 복귀부대는 일부는 해체되고 일부는 존속되었는데, 존속부대가 국내 도착후 현대화계획과 '73부대창설 조정소요에 따라 부대이동을 하거나 교대를 할 때 상당한 비용이 소요되었다.
    <도표 2> 철수병력의 감축 및 조정
    그러나 1972년말까지 잔류한다면 6개월 동안이지만 외화획득에 적잖은 도움을 줄 수 있고, 한국군의 실링 조정과 부대 재배치에 따르는 추가예산의 소요를 연기시킬 수 있었다. 또한 대월외환수입 중 군인 송금수입은 총수입의 20% 내외에 불과하고, 건설용역물품 군납과 기술자 송금 등에 의한 수입은 실제로 미군을 상대로 한 것이므로 대부분의 미군이 철수한 이후에는 한국군의 철수와 상관없이 격감하는 추세에 있었다. 외화수입액이 1969년에는 최고액인 1억 5,840만달러에 달하였으나 그 이후 주월미군의 철수에 따라 점차 감소되어 1972년에는 겨우 749만달러에 불과했다. 따라서 경제적인 측면에서 볼 때, 주월미군 95%가 철수한 1972년 12월 이후에는 베트남에 잔류할 이유가 없었다. 실제로 한 때 베트남에 진출했던 80여개의 상사 중 1971년 하반기까지 남아 있는 업체는 47개에 불과하며, 이들도 미국 회계연도가 끝나는 1972년 6월말까지는 대부분 철수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만 주월한국군의 철수가 시작되면 중단되었던 군원이관이 재개된다는 점이 다소 우리 경제에 위협요소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군원이관은 한국군현대화계획 추진과정에서 폐기되었다. 그리하여 1971년도에 2천만달러, 1972년도에 4천만달러, 1973년도에 5천만달러 합계 1억 1천만달러의 군원이관 협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군원이관을 이유로 철수를 더 늦출 이유는 없었다. 따라서 국방부는 1972년말까지만 잔류하고 1973년 초에 철수하는 방안을 결정했다고 판단된다. 한편 1973년말까지 잔류하는 방안은 외화획득면에서나 예산 소요기간 확보 측면에서는 가장 유리한 방안이었다. 그러나 1969년 미국의 '닉슨독트린' 발표를 기점으로 베트남특수의 열기도 점차 식어갔고 외화수입도 줄어드는 추세였다. 그러므로 파병이후 우리가 거둬들인 수준과는 비교도 안되는 적은 외화를 벌기위해 다른 철수요인을 배제한 채 베트남에 잔류할 필요는 없었다.
    (4) 대북관계
    1962년 4대군사노선과 1965년 3대혁명역량강화를 통해 전력증강을 가속화하고 있던 북한은 한국군의 베트남파병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김일성은 "조선로동당은 베트남 인민의 투쟁을 자신의 투쟁으로 인정하며, 베트남 민주정부가 요구할 때에는 언제나 지원병을 파견하여 베트남 형제들과 함께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고 강조했다. 김일성의 이러한 의지는 휴전선 일대에서의 도발로 나타났다.
    북한의 도발 실태는 1967년과 1968년에 극에 달했다. 경기도 포천군 철도폭파사건(1967. 9. 5), 경기도 파주군 미군군수물자 적재 화물차 폭파사건(1967. 9. 13), 청와대 습격사건(1968. 1. 21), 미해군 푸에블로호의 납북사건(1968. 1. 23), 울진·삼척지구 무장게릴라 침투사건(1968. 11. 3), 미군 비무장 정찰기 EC-121기 격추사건(1969. 4. 15) 등이 연달아 일어났다. 북한은 이외에도 무장공격, 남한어선의 빈번한 납북, 민간항공기 납치, 각종 테러 등을 끊임없이 자행하였다. 이로 인해 5차 베트남파병 논의는 중지되었다.
    이러한 북한의 도발은 주한미군의 철수 통고와 겹쳐 우리의 안보상황을 상당히 위협하였다. 이에 정부는 주월한국군의 철수를 단행하면서 '8·15선언'을 통해 남북대화를 제의하여 한반도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1969년 7월 '닉슨독트린'으로 변화되기 시작한 미국의 대외정책은 일·중공수교와 미·중공 관계정상화 등 동북아 국제정치 환경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고 북한도 예외가 아니었다. 북한은 1971년 8월 14일에 북한적십자를 통해 '이산가족찾기' 운동을 구체적으로 협의하기 위한 남북적십자회담 개최를 수락하였다. 이로써 남·북한 관계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남·북한 관계를 개선하여 대결상태를 평화적인 경쟁상태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1안이 유리하였다. 한국군의 베트남파병을 처음부터 못마땅하게 보고있던 북한은 조기 철수를 당연히 원했다. 그러나 북한이 남북대화에 응한다지만 이 역시 위장된 평화공세에 불과한 것임을 감안한다면 1안은 적합하지 않았다. 1안은 전술한 대로 대미관계와 대월관계를 악화시키고 한국군현대화계획을 지연시킬 가능성이 농후하므로 오히려 우리 정부의 자주국방태세 확립에 불리한 것이었다. 한편 2안과 3안은 베트남에서 유리한 상황을 전개하고 있는 북베트남에 고무된 북한을 자극할 뿐만 아니라 1968년을 기점으로 줄어든 대남도발을 부추겨 한반도에서의 긴장을 고조시킬 수도 있었다.
    미국의 대외정책 변화와 북한의 위협 증가로 인해 주월한국군의 철수가 시급했지만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토대로 한 동맹관계의 틀 속에서 유지되어 온 한·미관계에 있어서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한국이 추구한 자주국방은 미군의 개입없이 북한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지만, 장비와 보급에 대한 미국의 지원과 강대국의 개입에 대한 미국의 확고한 결의가 수반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특히 한국에서 유사시 북한의 단독 공격은 한국이 감당할 수 있다 하더라도 외부 세력의 지원 상황에서는 미국의 물자, 장비 및 직접 개입이 확고하게 필요하였으므로 집단안보체제를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북한의 위협이 증대될수록 한·미동맹체제는 우리에게 더욱 절실해졌다.
    결국 북한이 한국군의 베트남참전을 방해하고자 일으킨 도발이 한국안보의 위협요소로 작용하여 한·미동맹관계 강화의 필요성을 더욱 부각시켰고, 이에 우리 군은 철수연기를 원하는 미국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던 것이다.
    (5) 대미관계
    미국정부는 1972년 1월 25일 한국정부에게 주월한국군의 철수를 1972년말까지 연기하여 1973년 전반기에 철수해 줄 것을 정식으로 요청해 왔다. 당시 한국정부는 제1단계 철수와 병행하여 1972년말까지 잔여병력의 철수를 완료한다는 기본방침아래 제2단계 철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미국은 자국이 철수 중에 있고 다른 참전국의 철수는 방관하면서 유독 한국군에 대해서만 잔류를 강력히 종용하였다. 이것은 미국이 베트남에서 한국군의 영향력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또한 미국정부는 국내의 여론에 밀려 철수를 하더라도 급격한 연합군의 축소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위협에 대비하여 베트남에서의 평정도와 작전 성공률이 높은 주월한국군이 잔류해주길 바랬다.
    그러나 우리의 안보상황은 북한의 도발 가능성 및 '닉슨독트린'에 따른 미국의 역할 축소와 주한 미 제7사단의 감축 등으로 위협받고 있었다. 따라서 안보공백을 메우기 위해서는 한시라도 빨리 주월한국군을 철수시켜야만 했다. 하지만 당시의 자주국방이란 독자적 국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주적 국방의지에 의해 동맹국과의 집단안보체제 즉, 미국과의 연합방위태세를 유지하면서 우리에게 맞는 무기체계와 교육훈련, 전술교리의 발전 등을 가능한 범위 내에서 독자적으로 개발하여 한국화해 가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므로 공산세력의 군사적 위협에 대처하여 한반도에서의 전쟁억제와 평화유지를 위해서는 한·미 양국간의 공동노력이 한층 더 요구되었다.
    또한 미국이 '국가안전보장회의 정책결정 각서 48'(National Security Decision Memorandum 48)에서 주한미군 1개 사단을 감축하지만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돌아올 때까지는 더 이상 감축하지 않겠다고 한국에 통보했으므로 주월한국군의 조기철수는 주한미군의 추가철수를 부추겨 안보상황을 어렵게 만들 수도 있었다.
    따라서 한국은 주월군의 철수문제로 인해 미국의 대한방위공약과 대한지원이 약화되어서는 안되며, 미국의 한국에 대한 정치적·외교적 및 경제적 기존 공약이 계속 유지되어야 했다. 그리고 한국정부가 아무리 철수를 원한다고 해도 미국정부의 협조없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였다. 주월군의 수송문제는 미국이 전적으로 담당했고, 주월군의 장비소유권 문제도 미군의 협조하에 우리에게 소유권이 이양되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따라서 우리 정부는 미국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군은 미국의 요청대로 1972년말까지 잔류하기로 방침을 정한 것이었다. 하지만 군은 주월한국군의 철수연기의 조건으로 현 수준의 주한미군의 계속적인 잔류, 이미 합의된 한국군현대화계획의 보장과 촉진, 주월한국군의 안전보장, 잔류 한국군에 대한 원활한 전투지원 및 군수지원을 위한 군사실무약정서의 수정 및 보완, FY72 군원삭감 9,000만달러의 추경반영과 군원 10% 원화예치 취소 등 한국에 대한 계속적인 군사·경제적 지원을 최대한 확보함으로써 자체방위능력을 갖추어 나갔다.
    (6) 대월관계
    베트남정부는 처음부터 주월한국군의 철수연기를 강력하게 요청하였다. 베트남정부는 키엠(Tran Thien Khiem) 수상(1971. 7. 1), 티우(Nguyen Van Thieu) 대통령(1972. 2. 11) 등 수차례에 걸쳐 주월한국군을 1973년말까지 잔류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베트남정부는 베트남군의 전력이 완전히 증강되기 전에 적이 대공세를 취해 올 것으로 보고 베트남의 자체방어가 가능해 질 때까지 잔류해 주길 원했다.
    이에 대해 유재흥 국방부장관은 주월한국군에 대한 미국의 안전보장이 해결된다면 1972년말까지 잔류하고 1973년 초에 철수를 하겠다고 밝히고 베트남정부의 협조를 당부하였다.
    그러나 미국정부는 미군의 주월한국군 안전보장을 전제로 1972년말까지 잔류하겠다는 우리 정부의 방침에 대해서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주월한국군의 철수문제는 한·베트남간의 협의 이전에 미·베트남간의 협의에 달려있었다.
    따라서 한국이 2안을 결정하더라도 우리 정부와 베트남과의 관계는 크게 악화될 여지가 없었다. 그것은 철수를 시행한 한국보다 한국군을 잡아주지 않은 미국정부에 더 큰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엔 반 베(Nguyen Van Be) 베트남 국방부장관이 베트남을 방문한 유재흥 국방부장관에게 한국정부의 입장을 이해하고 대미교섭에 있어 공동보조를 취할 것을 다짐한 사실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1안은 베트남의 정세와 형편을 고려하지 않은 안으로 그동안 주월한국군이 거둔 성과에도 불구하고 베트남과의 관계를 악화시킬 소지가 다분하였다. 물론 주월한국군의 과다한 피해를 방지하고 세계에 호전국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는 가능한 조속히 주월한국군을 철수시켜야 했다. 그러나 미군 및 기타 주월연합군이 철수할 때에 철수하지 않다가 베트남의 정세가 극도로 악화된 상황에서 철수를 단행하는 것은 우방으로서의 처사가 아니었다. 이 상황에서 조기철수를 하면 대월관계의 악화를 자초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하여 우리 군수뇌부가 베트남을 수차례에 걸쳐 방문하여 베트남정부와 조율한 후에야 2안을 결정하였다. 2안은 미국에게 베트남 수호의 공동책임을 부각시키면서 미국과의 협의만 이루어진다면 '베트남화계획'이 완료되는 시점인 1972년말까지 만이라도 잔류하겠다는 제안이었으므로 대월관계에는 별 지장이 없었다.
    4. 撤收 協議 過程
    (1) 대미 협의
    정부는 제2단계 철수에 대비하여 이미 1971년 10월 8일 제1차 한·미 군사실무자회의를 개최하여 철수에 따른 현안문제를 협의하기 시작하였다. 한·미간의 실무협의는 1971년 10월부터 1972년 3월까지 개최된 5차례의 한·미 군사실무자회의를 통해서 1972년 3월 16일 병력수준 조정, 장비소유권 이관 및 군수지원 문제 등을 원만히 합의하였다.
    그러던 중 최종 철수방침이 결정되자, 정부는 1972년 5월 25일에 "1973년 1월부터 조속한 시일내에 전 주월한국군을 철수시킨다"는 2단계 철수 방침을 미국·베트남 정부에 통고하고 이에 따른 실무협조를 당부하였다.
    국방부는 정부의 제2단계 철수 방침에 근거하여 국방부 훈령 72-140호(1972. 7. 26)를 주월한국군에 하달하였다. 이세호 주월군사령관은 1972년 7월 27일 국방부 훈령 72-140호를 접수하고, 1972년 7월 31일과 8월 1일에 베트남군 총참모장 비엔(Cao Van Vien) 대장과 주월미군 부사령관 웨이안드(Weyand) 대장을 각각 방문하여 주월군 철수계획을 통보하면서 미·베트남군측에 '한국군 철수지원' 문제 협의를 위한 실무자 회의를 제의하였다. 이에 대해 베트남군은 의아심을 표명했으나 미군측은 최대한의 철수지원을 약속하였다.
    이에 윤흥정 주월군 부사령관은 제1차 한·미 실무자 회의를 개최하여 주월군의 철수개념, 제대편성 및 일정 계획을 포함한 기본계획을 통고하였다. 주월미군사령부는 이 기본계획을 기초로 하여 '주월한국군 복귀'를 목적으로 한 주월한국군 철수지원계획(주월미군 지원사령부 작전계획 J211A)을 작성하고, 이를 해당 미군 지원병과 부대장에게 하달하여 한국군의 철수에 따르는 장비휴대지침과 항공기 및 선박의 지원책을 마련하였다.
    한편 주월사령부는 국방부 훈령 군수부록에 의거하여 철수부대의 현 보유장비 및 기타 보급품 전량을 휴대하고 귀국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주월사령부는 '많이' '최고의 상태로' '싸게' '견고히 포장' 정확한 인계'를 통한 전투력 제고와 국익 기여를 철수목표로 삼아 한·미 군수협의에 최선을 다했다.
    당시 미국과 한국은 한·미군사실무약정('69. 4. 30), 제12차 한·미 군수실무회의시 합의한 사항('71. 11. 3), 한·미 합의각서('72. 1. 21)에서 합의된 사항을 대미 절충의 기본으로 삼았다. 특히 국방부는 1972년 1월 18일에서 21일까지 미 육군성 대표와 절충한 합의각서에서 한·미소유권과 기타 군수지원에 관한 정책적 조정 및 방침을 일단락 지었다.
    대미절충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협의문제는 장비의 소유권문제였다. 1969년 4월 30일 주월 한·미사령관에 의해 협정된 한·미군사협정서(MWA)에서는 주월한국군의 장비소유권을 '최초 파월당시 휴대한 장비와 베트남에서 전투손실 및 정상마모로 인하여 동종(in kind)으로 보충된 장비'라고 명시하였다. MWA는 파월이후 베트남전투간 주월한국군의 군수지원문제에 대한 한·미간의 책임을 명시하는데 목적이 있었으므로 MWA에 표시된 한·미소유권의 구분개념은 철수를 전제로 할 때 애매한 점이 많았다. 특히 MWA의 규정 중 '베트남에서 전투손실 및 정상마모로 인하여 동종으로 보충된 장비'에 대한 해석은 한·미간에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예를 들면, 한국측은 M1소총을 반납후 보충된 M16소총이 동종류라고 주장한 반면, 미측은 M1소총과 M16소총은 결코 동종류라고 볼 수 없으므로 베트남에서 새로이 지급된 M16소총 전량은 미소유권장비라고 주장하였다. 즉 파월당시 휴대하지 않고 베트남에서 새로이 공급받은 품목은 모두 미측 소유라는 것이었다. 이럴 경우 주월한국군의 보유 장비 중 78%가 미 소유권에 귀속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군은 1970년 5월부터 7차례의 한·미군수회의를 개최하였다. 한국군은 1차회의(1970. 5. 13∼14)에서 장비소유권문제를 제시하였다. 한국측은 현행 MWA 제7항의 장비소유권문제를 "주월한국군이 보유한 모든 장비는 소유권이 한국정부에 귀속되고 주월한국군이 철수시에 한국으로 후송한다"로 수정할 것을 제의하였다. 한국측은 제2차회의(1970. 11. 24∼11. 27)와 제3차회의(1871. 4. 29∼30)에서도 이 사항을 거듭 요청하였으나 미국측은 답변이 없었다.
    1971년 7월에 들어와 주월한국군 일부가 철수하는 정부방침이 확정됨에 따라 미결상태인 장비소유권문제가 시급해지자 주월한국군사령부는 제4차회의(9. 22∼24)에서 품목별로 장비소유권을 결정하자고 제의하였다. 주월한국군의 체계적인 자료 제시와 강력한 주장에 미측은 결국 한미소유권의 구분기준과 품목별 장비 소유권을 한국측에 유리하게 합의하였다. 그 결과 한국군은 최초 파월당시 휴대한 장비, 베트남에서 전투망실·정상마모로 보충된 모든 유사장비를 소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측은 해병대 장비에 대해서만 소유권 구분을 실시하였을 뿐 육군장비에 대해서는 소유권 확정을 기피하였다. 이에 한국측은 본격적으로 철수문제가 논의된 5차회의(1971. 11. 3∼5) 때부터 육군장비의 소유권 구분작업을 요구하여 6차회의(1971. 11. 26∼30)에서 해병대 장비에 적용된 한·미소유권 구분방식을 육군부대장비에도 적용시켰다. 제7차회의(72. 1. 17∼21)에서는 그간 수차의 한·미회의에서 합의된 육군장비에 대한 한미소유권 구분을 최종 확정하였다. 이로써 MWA에 명시된 동종류 보충장비를 한국 소유권으로 귀속시켜 약 680만달러의 이익을 초래하고 신형장비를 한국측에 이관하였다. 예를 들면 M1대신에 M16소총을, 2 1/2톤 덤프트럭 대신에 5톤 신형 덤프트럭을 1대 1로 교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2단계 철수이후까지 현대화된 장비는 <도표 3>과 같이 화력, 기동, 통신, 공병 등 57개 품목에 걸쳐 총 5,275만달러에 달했다.
    <도표 3> 장비현대화 실적
    (단위 : 만달러)
    다음으로 문제가 된 협의는 복귀시 휴대재산의 기준 설정이었다. 미군측은 '베트남화정책'에 따라 베트남군의 전력을 강화시켜야 하므로 베트남에 도입된 장비와 물자를 베트남 외부로 반출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이에 반해 한국군은 "베트남에서 한국으로의 철수는 작전지역의 이동에 불과하고, 복귀후 국군의 사명이 더욱 중요하므로 현재 베트남에서 보유한 한국군의 전투력을 약화시켜서는 안된다"는 입장에서 가능한 한 모든 보유장비를 철수시 휴대하고자 하였다. 이에 1971년 8월 17일 주월사 군수참모는 주월미군사령부(MAC-V) 군수참모를 방문하여 복귀부대의 휴대재산 기준설정에 관한 협의를 개시하였다.
    본 협의 역시 주월한미사령부간의 회의에서 우리측에 유리한 방향으로 합의를 도출하였다. 그리하여 주월사는 전투구량(戰鬪口糧), 탄약 휴대 문제 등을 개인당 7일분의 케이-레이션을 한국에서 인수받고, 현 보유탄약 모두를 무상으로 휴대하는 방식으로 해결하였다. 그 외에 ASL(인가저장목록), PLL(규정휴대량목록) 등 여러 분야에서도 한국측의 입장을 최대한 반영시켰다.
    끝으로 미소유권장비의 이관에 있어서도 한·미간에 의견이 달랐다. 미국측은 주월한국군이 보유한 미소유권장비를 베트남군에게 이양할 계획이었다. 반면 한국측은 미소유권 장비를 휴대하지 못할 경우 복귀와 동시에 그 전투력은 극히 약화된다는 판단하에 최대한 미 소유권장비를 휴대하고자 노력하였다. 따라서 국방부는 추진 중인 장비현대화계획 및 본국의 현 장비 보유현황과의 상호연관성을 고려하여 이관 대상품목과 이관가격을 결정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협의과정에서 한국군이 이관을 강력히 요구한 품목은 지뢰탐지기, 헬리콥터 등이었는데, 미국측은 이관불가 품목으로 설정하였다. 그리고 우리측은 군원에 관계없이 LSE(노후초과품)와 NON LSE(비노후초과품) 형식으로 원가의 1/3가격으로 이양받고자 하였으나 미측의 요구대로 LSE와 NON LSE로 구분하고 각각 신품가격의 1/3 혹은 56%로 이양받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우리측은 미국의 이관불가 품목과 LSE와 NON LSE 품목의 결정을 제2단계 철수 60일전까지 결정하기로 합의함으로써 차후 협상의 여지를 남겨두었다.
    이러한 대미절충은 1972년 1월 21일 한·미합의각서에서 주요사항들이 우리입장을 최대한 반영된 수준에서 확정되었다. 우리 군은 한·미간의 합의각서(1972. 1. 21)에 따라 주월한국군의 보유재산 중 미·베트남측으로부터 차용한 장비는 반납하고, 일부는 베트남군에게 이양했으며, 그외의 전량은 본국으로 해상 수송하였다. 그리하여 주월한국군은 <도표 4>와 같이 총 3,067만달러 상당의 장비와 물자를 휴대하여 복귀하였다.
    제2단계 철수 협의는 1972년 8월 15일부터 19일간에 걸쳐서 진행된 한·미 군수실무자회의에서 ASL/PLL, 탄약, LSE/NON-LSE, 미소유권장비의 반납, 기타 품목별 휴대 및 반납 기준, 장비정비, 해외순환정비, 수송지원, 한·미합동재물조사 등 17개 세부항목에 대해 최종 합의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도표 4> 휴대재산현황
    (단위 : 달러)
    아울러 주월한국군사령부는 9월 27일 미군 지원사령부로부터 받은 작계(J211A)와 주월군 철수의 기본방침을 담고 있는 국방부 훈령(72-140호, 1972. 8. 27)을 기초로 제2단계 주월군 복귀계획(작전계획 72-2호, 1972. 9. 30)을 작성하여 10월 5일 하달함으로써 시행하였다. 이것은 휴전에 관계없이 실시될 정상적인 철수에 대비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1972년 10월에 파리 평화회담이 본격적인 휴전협정 단계에 들어가자 이세호 주월군사령관은 10월 30일 주월미군사령관 웨이안드 대장과 휴전에 대비한 긴급철수계획을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휴전후 60일 이내에 복귀하는 문제를 위시하여 주월미군사령부 및 베트남군 총사령부와 병력과 장비 수송 및 진지 인계를 포함한 철수에 필요한 제반 문제를 협의하였다.
    이리하여 주월한국군사령부는 11월 11일 주월미군사령부로부터 미군 및 우방군 철수지원계획(COMUSMACV 작전계획 J-215, Thunderbolt : '72. 11. 9)을 접수하여 비상철수계획을 완성하게 되었다. 이로써 주월한국군사령부는 정상 및 비정상철수의 어느 경우에라도 대처할 수 있는 준비를 완료하고, 1972년 11월 13일 휴전일로부터 60일 이내에 복귀하는 주월군 철수계획 72-3호를 시행하였다.
    (2) 대월 협의
    주월한국군 철수 지원에 대한 한·미간의 실무자 협의는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한·베트남간의 실무자 협의는 주월한국군 철수를 반대하는 베트남 정부의 입장 때문에 무산되었다. 당시 베트남 정부는 '베트남화계획'에 따라 제1군단 및 제2군단 지역에 각각 1개 보병사단을 창설하도록 되었다. 그러나 한국군에게 철수 구실을 준다는 이유로 한국군 주력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제2군단 지역에서의 사단 창설을 보류할 정도로 한국군 철수를 강력히 반대하고 있었다.
    이에 정부는 1972년 9월 6일 "1972년말까지 잔여 한국군을 유지하고 1973년 1월부터 철수를 시작한다"는 주월군 철수에 관한 정부각서를 유양수 주월 한국대사를 통해 베트남정부에 재확인시키고 한·월 군사실무자 협의를 촉구하였다. 그러나 베트남정부는 묵묵부답이었고 철수문제는 협의되지 않은 채 시간만 경과하여 철수준비에 소요되는 최소한의 준비기간인 3개월도 확보할 수 없는 급박한 실정에 이르렀다. 1972년 9월 9일 주월한국군 부사령관 윤흥정(尹興楨) 소장이 베트남군 총사령부 참모장 만(Manh) 중장을 방문하여 철수에 관한 정부 각서 내용을 전달하는 한편, 한국군 철수에 따른 전술책임지역 및 전술기지의 인계인수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실무자 회의 개최를 강력히 제의하였으나 만 중장은 역시 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1972년 9월 23일 베트남정부는 유양수 주월 한국대사를 통하여 '주월한국군의 철수연기'를 각서 형식으로 정식 요청하였다.
    이처럼 베트남측의 비협조로 한국군의 작전임무와 진지 인계 문제의 진전이 없자 주월한국군사령부는 주월미군 지원사령부와 긴밀히 협조한 끝에 주월한국군의 주력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지역의 베트남군 제2군단장과 주월한국군 야전사령관이 진지를 직접 인계인수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였다.
    이에 따라 1972년 11월 15일 베트남 제2군단사령부에서 한·베트남·미군 간에 합동회의를 개최하여 한국군의 작전지역 인계, 국지수송, 도로 사용, 항만과 공항사용 문제를 협의하였으며, 이 자리에서 주월한국군측이 한국군 진지인계 일정계획을 베트남군에게 전달하였다. 베트남군은 1972년 12월 2일 한국군이 제시한 진지인계 계획에 대하여 베트남군의 진지인수계획을 제출함으로써 한·베트남간에 132개의 전술기지 및 작전임무에 관한 인계인수계획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주월군은 한국군이 사용하던 전투진지를 이양함에 앞서 진지의 보수 및 보강작업을 실시하여 한국군의 군기엄정함과 막강한 전투력을 베트남군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장벽을 포함한 진지의 요도를 명확하게 작성하여 인수부대가 진지 인수 후 활용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진지 인계인수 간에는 진지요도와 현지를 대조하여 가면서 세밀하게 인계인수하도록 하였고, 한국군이 보유한 진지를 가능한 전부 인계하였으며, 베트남군이 인수하지 못하는 39개 진지는 완전히 폐기하여 차후 적이 역이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진지 인계인수가 해결됨으로써 철수에 관한 협의가 일단락되었다.
    5. 結 論
    2차례에 걸쳐 실시된 주월한국군의 철수는 미국 대외정책의 변화와 미·북베트남 평화협상의 진전으로 이루졌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필자는 본고에서 주월한국군의 철수를 미국의 대외정책 변화에 자주적으로 대응한 한국군의 입장에서 재조명하였다. 특히 한국군이 철수를 시행함에 있어서 철수방침을 결정하고, 미·베트남과 철수관련 실무를 협의하는 과정에서 담당한 역할은 성공적인 철수를 이끌어낸 결정적인 축이었다.
    당시 주월한국군의 철수문제는 국제정세 및 베트남정세가 휴전협정을 둘러싸고 북베트남과 미국간의 화전양면정책에 따라 민감하게 전개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국내·외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하지만 주월한국군의 철수는 한국의 안전보장에 지대한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우리의 우방인 미국과 베트남의 국익에도 막대한 영향을 주게 될 것이 분명하므로 섣불리 결정할 수 없는 문제였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행정부와 국회가 주월한국군의 철수문제로 심사숙고하고 있을 때, 군은 정부의 철수방침과 다른 방침을 제안하였다. 즉 국내·외정세를 감안하여 "1972년말까지 철수하자"는 기존의 정부방침을 "1972년말까지 잔류한 다음 1973년 전반기에 철수하자"는 방침으로 조정하자고 건의하였다. 이 건의는 주월한국군사령부의 정세보고와 군수뇌부의 여러 차례에 걸친 베트남방문을 통해 검토되었고, 1972년 2월 유재흥 국방부장관의 베트남방문 결과와 국방부의 [제2차 철군계획에 대한 연구]를 통해 최종 결정되었다. 이어 국방부는 최종 철수방침을 정부에 건의하여 정부의 방침으로 확정시켰다. 군은 확정된 방침에 따라 미·베트남과 실무협의를 끈질기고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그 결과 한국군은 전투력과 국익 차원에서의 성과를 극대화시키고, 국가의 정치·경제·사회 특히 군사적 발전에 하나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한국군은 철수 결정과정에서 국내·외의 정세를 면밀히 분석하였다. 현지부대인 주월한국군사령부는 [중요 첩보보고], [일일전황보고], [주간·정기 정세보고], [월간전략정보보고], 주월한국군사령관의 서신보고 등을 통해 베트남정세와 주변국의 근황을 체계적으로 파악하여 보고했다. 이세호 주월군사령관이 최초 철수방침을 수정하자고 건의한 것도 이러한 정확한 분석 때문에 가능하였다. 국방부는 서종철 육군참모총장과 심흥선 합참의장의 베트남방문을 통해 베트남의 군사정세와 현지 동태를 살피고, 철수결정으로 인하여 파생될 문제들을 면밀히 연구하였다. 그 결과 국방부는 철수방침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한·미동맹관계 강화를 통한 자주국방태세의 확립'에 목표를 두고 국내·외여론, 한국군의 안전보장문제, 경제적 요인, 대북관계, 대미관계, 대월관계 등을 총체적으로 고려하여 1973년 전반기에 철수를 완료하기로 철수방침을 결정하였다. 만약 국방부의 이러한 검토와 분석이 정확하지 않았다면 주월군의 철수결정은 내외 정세의 추이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우리에게 불리한 영향을 주게 되어 불행한 결과를 초래했을지도 모른다.
    주월한국군은 5차의 한미군사실무자회의, 12차에 걸친 한·미군수회의와 한·미·베트남 합동회의, 군수실무자회의, 수십차에 걸친 서한 등을 통해 실무를 협의하는 과정에서도 한국전력의 강화 및 추진 중이던 한국군현대화계획과 연계하고자 끈질기게 절충하였다. 특히 주월한국군이 '많이' '최고의 상태로' '싸게' '견고히 포장' '정확한 인계'라는 철수목표(군수) 아래 체계적인 자료 제시와 논리정연한 협상으로 최대한의 물자와 장비를 휴대한 것은 전투력 증가 및 국익의 보장에 직결되었다. 여기에는 국방부 군수실무자의 조언과 유기적인 협조도 한 몫을 하였다.
    난관에 봉착했던 대월협의도 주월한국군사령부가 주월미군사령부와의 협의 끝에 한국군 주둔지역의 베트남군 제2군단장과 주월한국군 야전사령관이 진지를 직접 인계인수하는 방식을 마련하여 베트남정부의 합의를 이끌어냈다. 나아가 주월한국군은 베트남의 인수부대가 인수후 활용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진지요도를 명확하게 작성하여 세밀하게 인계하고, 베트남군이 인수하지 못하는 진지는 완전히 폐쇄하여 차후 적이 역이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등 철수로 인한 베트남군의 공백을 최대한 보완함으로써 베트남정부로부터 군사적인 신의를 잃지 않았다.
    이처럼 한국군이 철수과정과 협의과정에서 보여준 자주적 결정은 국가대사의 결정권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집중되어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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