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최상영 작성 : 2005.08.15 조회 : 11,771 |
남침용 땅굴이 어디까지 내려왔는가 남침용 땅굴! 어디까지 내려 왔는가? 출처 http://www.ddanggul.org/ 1. 장거리 남침용 땅굴 가. 과연 어디까지 내려 왔을까? 6.25가 끝 나갈 무렵 고착된 진지에서 한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피아(미, 중공군 제외)간 치열한 혈전이 계속되는 동안 아군의 포탄을 피하고 자신들의 장비를 보호하기 위해 북괴 군은 땅굴을 파기 시작했고 그 효과는 상상외로 좋았다는 것을 당시 김 일성이 터득했다고 한다. 그 결과는 휴전 후 DMZ 북쪽 북괴 군 포 진지가 대부분 산의 굴속에 들어 가거나 평야에 유개형의 강력한 Y형 진지로 바뀌게 되었다. 또한 화곡 광산의 굴이 왜정 때 광석 굴착목적으로 이미 임진강 밑에까지 뚫려 있었음을 김 일성은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 같은 상황 및 탈북자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김일성은 휴전 직후 곧 바로 땅굴을 파기 시작 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땅굴의 안전성과 효율성을 파악한 김일성은 아마도 초기에는 이를 전술목적 달성의 수단(김일성이 "전쟁초기에 의정부, 동두천 일대의 미군을 포로로 하기위해 땅굴을 열심히 파라"고 격려한 것을 보면)으로 아군 전방 부대를 무력화하기 위해 30-50km 이하의 단거리 땅굴을 파려고 했을 것으로 예상되나 휴전 상태가 길어져 시간적 여유가 많아 지고 TBM(tunnel boring machine)이 개발되어 상용화 되자 자연히 장거리 땅굴을 팔 수 있게 되었고 이는 곧 김일성의 전략목적 달성의 수단으로 이용 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장거리 땅굴이 과연 어디까지 내려왔을까? 산술적으로 한 번 계산 해 보자. 임진강을 헤엄 처 넘어온 김 남준의 말에 의하면 그가 태천에서 산에 굴을 파는데 참여했었다고 한다. 당시 굴의 직경은 약 10m 였으며 군 1개 분대가 1개조로 3개조 3교대로 24시간 땅굴 굴착 작업을 했는데 하루 평균 8m를 팠다고 한다. 이는 엄청난 굴착 속도다. 이를 2.5m 직경의 땅굴(장거리 남침용 땅굴의 평균 직경)로 산술적으로 환산해도 120여 m가 되니 줄잡아 하루에 최소 20m이상은 팔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속도로 1년간 계속 판다면 약 7km 이상 굴착할 수 있었을 것이며 1960년부터 1970년까지 10년 간 계속 했다면 70km를 굴착했을 것이다. 이는 김포지역 누산리 주민들의 땅굴 신고와 대략 일치한다. 즉 1960년대 중반에 김포지역에서 고령토산이 깎여졌는데 이때 그 곳에서 소형 땅굴이 나왔다고 한다. 물론 그 때는 이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뿐 아무도 이북에서 내려온 남침용 땅굴이라고는 생각지 안했다고 한다. 1960년대 후반부터 상용화되기 시작한 TBM을 북괴가 1970년부터 도입 사용해 왔다고 가정해 보자. 국내에서 TBM을 사용하는 토목 기사들의 말에 의하면 직경 2.5m일 경우 하루(24시간)에 60m는 굴착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30m씩 만 팠다 해도 1년에 적어도 10km는 굴착할 수 있었을 것이며 그 때부터 지금까지 30년 이상 계속 팠다면 300km이상 굴착할 수 있어 이를 수동으로 굴착한 70km와 합한다면 약 370km가 되기 때문에 지금쯤은 아마도 부산까지 충분히 내려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또한 사천 비행장 주변의 주민들이 지하에서 이상한 소음을 듣고 자기 집의 심한 진동을 느꼈다라든가 지하의 일정 깊이에서 짠물이나 기름냄새가 나는 물이 나온다라든가 하는 말을 하는 것으로서 대략 추정이 가능하다고 본다. 나. 장거리 남침용 땅굴 신고 상황 * 본인이 국방부 장관 과학기술 보좌관(국방과학 연구소 연구위원 겸직)으로 재직하던 중 1992년 중반(최 세창 국방부 장관 재직시)부터 땅굴 신고에 접하기 시작했다. 당시 민원인 정지용(전 보안사 대공 수사과 장교)씨 등의 신고로 장거리 남침용 땅굴이 국회에서 문제화되자 육군이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하게 되었다. 따라서 본인이 육군 실무자의 사전 보고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육군의 주요 쟁점이 민원인들이 주장하는 곳을 확인한 결과 땅굴이 아니라는 것과 장거리 땅굴은 기술적으로 불가능 하다는 내용이었다. 본인은 "확인해 보니 땅굴이 아니다 라는 육군의 주장"은 인정할 수 밖에 없었으나 "장거리 땅굴 굴착이 불가능하다."는 내용은 잘 못 되었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해 주고 장관 보고 시에는 삭제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당시 정보 참모(김진오 육군 소장)가 장관에게 보고하는 내용을 들어보니 장거리 땅굴 굴착이 불가능하다는 내용을 그대로 써왔으며 이로 인해 보고도중 최세창 국방부 장관에게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그리고 나서 조금 있다가 국방부 합동 조사대 직원 한 명이 나를 찾아와 하는 말이 "육군은 장거리 땅굴이 없다고 하는데 귀순자들(김남준 등) 말에 의하면 장거리 땅굴이 반드시 있다고 합니다. 저희들은 판단하기 어려우니 시간 있으면 검토 해 줄 수 있겠읍니까?"하는 것이었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본인은 합조대 직원에게 김남준씨와 민원인 정지용씨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한 후 김남준씨 부터 면담하면서 확인하기 시작했다. 김남준씨는 앞에서와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김부성과 신중철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그들은 왠지는 알 수 없으나 장거리 땅굴을 부정하며 육군의 대우를 잘 받고 있는 것 같다."고 이야기하며 흥분해서 이야기 했다. 다음으로는 정지용씨가 가져 온 민원 서류를 하나씩 검토하며 확인하기 시작했다. 당시 정지용씨 말에 의하면 땅굴 탐사 현장에 있던 모 파출소 순경, 보안사 장교도 땅속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으며 이를 감지한 현지 사단 정보참모의 방해 지시로 모두 철수하고 그 이상 작업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다음날 아침 본인은 즉시 전화로 확인하기 시작했다. 먼저 해당 파출소에 전화를 하여 땅속에서 나는 기계음을 들었다는 순경을 찾아 물어본 결과 그것은 사실이었고 보안사 장교 역시 사실이라고 대답했다. 사단 정보참모에게도 확인한 결과 땅굴 탐사 민간인들을 쫓아 낸 것도 사실이나 자기가 스스로 한 것이 아니고 육군 본부 탐지과 지시에 의해 이루어 졌다 고 대답했다. 추가적으로 정지용씨는 말하기를 당시 육군총장(김진영 대장)이 암행어사 격으로 보낸 모 육군 중령이 땅굴징후를 모두 확인하고는 상당히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했다. 본인은 즉시 확인해 본 결과 총장의 함구령으로 자세히 말할 수는 없으나 땅굴징후는 사실이라고 말하며 자기와의 통화사실을 보안 유지해 달라고 재차 당부하는 것이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김일성이 원하는 바가 남한에서 잘 지켜지고 있었다. 결국 본인은 최종 확인을 위해 정지용씨에게 요구하여 땅속에서 소리가 날 경우 언제든지 좋으니 알려 달라고 했다. 몇 일 후 정지용씨로부터 전화를 받고 현장인 행주산성으로 갔다. 그 때가 밤 11시 경이었는데 earphone을 통해 땅속에서 나는 기계음을 직접 들을 수가 있었다.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상기 상황을 종합한 후 육군본부 탐지과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탐지 과장은 말하기를 민원인들이 땅굴을 탐지했다고 자주 신고하는 이유는 “보상금을 받기 위해서 입니다.” 라고 했다. 그래서 본인이 질문하기를 “땅굴이 않나와도 신고만 하면 보상금을 줍니까?”라고 하니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리다가 “아닙니다. 그 보다는 군이 절개 작업을 하면 그들이 우물을 거저 팔 수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다시 질문하기를 “지금까지 몇 개나 우물을 거저 파 주었습니까?" 라고 질문하니 “아직까지는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또한 탐지과장은 민원인들이 땅굴이 있다고 주장하는 곳을 확인하기 위해 수 백 구멍을 뚫느라 많은 시간과 수 백억 원의 예산을 낭비했다고 주장 했다. 이에 대해 본인이 그런 곳들을 같이 가서 확인해 보자고 제안하자 다시 말을 바꾸어 “사실은 한 곳을 확인해 보았는데 땅굴이 아니었습니다.”라고 했다. 다시 민원인(정지용)에게 확인해 보니 한 곳을 확인한 것은 사실이나 탐지과 녹음기는 처음부터 고장난 상태였다고 대답했다. 그 당시 옆에 설치했던 정지용씨 녹음기에서는 지하의 기계음이 녹취 되었는데 탐지과 녹음기에는 녹음이 않되어 이상하게 생각되어 작업하던 탐지과 병사를 심문하여 그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당시 정지용씨는 현역 보안사 대공 수사과 장교였다). 다음으로는 탐지과 탐사장비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탐지과에서 땅굴 탐사용으로 사용하는 펨스라는 장비는 확인 결과 매질에 따라 달라지는 전자파의 투과 및 반사 성향을 이용하여 땅굴의 빈 공간을 찾는 장비로 적의 대응책(펨스장비를 사용하기 위해 시추공을 뚫기 시작하면 요란한 소리때문에 지하에서 이를 알아 차리고 빈 공간을 흙, 자갈 등으로 채운다. 아직도 이 같은 장비를 사용하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거의 효과를 발휘할 수 없는 장비였다. 뿐만 아니라 탐지과의 전자분야 전문가라는 모 대위를 확인해 본 결과 임피던스(impedance)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수준이었다. 위와 같은 모든 사실들을 확인한 후 국방부 장관(당시 최세창 장관)에게 다음과 같이 종합 보고 했다. 첫째 육군이 사용하고 있는 펨스 장비로는 땅굴을 찾기가 어려우며 둘째 민원인들의 땅굴 신고는 상당히 근거가 있고 확실시 되며 셋째 장거리 땅굴 굴착은 기술적으로 전혀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 육군에 땅굴 탐사를 철저히 하도록 지시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보고가 끝나자 최세창 장관은 약간 흥분되어 그 자리에서 즉시 당시 합참의장(이필섭 대장)을 불러 “육군이 땅굴을 찾든지 말든지 개의치 말고 내가 국방부 예산을 별도로 줄 테니 의장이 직접 땅굴을 확인 하라”고 지시하여 합참 주관으로 후평리 민원인 땅굴 신고 지역을 확인키로 했다. 작업이 진행 되던 중 민원인으로부터 지하에서 기계음이 녹음되었다는 사실을 본인은 통보받고 다음날 합참 책임자인 모 공군 준장과 함께 직접 확인하러 가기로 하고 탐지과에 연락하여 민원인들을 그 곳에 대기토록 했다. 다음날 아침 그 곳에 직접 가서 보니 민원인들이 한 명도 없었다. 이상해서 탐지과 심서기관(당시 탐지과 현장 책임자)에게 물어 보니 민원인들에게 연락했으나 국방부에서 확인하러 나온다고 했더니 모두 달아 났읍니다라고 하여 옆에 있던 권(?) 모 소령에게 재차 강하게 확인 질문을 하였더니 연락하지 않했다고 대답했다(심서기관이 거짓말 ). 다시 심 서기관 에게 녹음기에 녹음된 소리가 있느냐고 질문했더니 녹음된 소리가 있어 확인 중에 있다고 대답 했다. 본인이 국방부를 떠날 때까지 녹음된 소리가 무엇인지 보고 받지 못 했다. 이상과 같이 탐지과가 땅굴징후를 무시하거나 허위보고를 자행하는 것은 적성세력이 탐지과에 있거나 기타 다른 이유로 실무자들이 땅굴을 은폐하고 상급자(육참총장 등)에게 보고하지 않는 것으로 본인은 생각했다. 따라서 이런 사실을 육참총장에게 본인이 직접 알리기 위해 후배인 최 모 육군 장에게 부탁하여 당시 육참총장인 김진영 대장을 면담케 되었다. 면담 도중 본인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김진영 총장은 논리적인 답변도 없이 땅굴징후에 대해 무조건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며 땅굴에 대해 긍정적인 이야기를 하거나 땅굴 찾는 사람들에게 인신 공격적인 발언을 서슴ㅎ지 않했다. 기분이 언짢게 된 본인은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 땅굴 책임을 맡고 있는 모 육군 준장이 민원인들과의 술자리에서 “이 곳에서 땅굴이 나오면 내가 군복을 벗겠다.”는 말을 했다니 하급 장교들이 감히 땅굴을 찾을 수 있겠느냐고 했다. 이 말을 들은 김진영 육참총장은 즉시 답하기를 “땅굴이 나오면 그 장교가 왜 군복을 벗어요? 내가 벗어야 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답변이 아닌가? 이 때부터 본인은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혹시 전두환 대통령이 땅굴을 싫어 하니까 이와 관련되지 않했나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재차 김진영 대장을 만나 새로운 정보를 전했다. 즉 보안사의 모 육군 대위가 땅굴 징후를 발견했다고 하니 총장께서 비서실장을 통하지 말고 직접 확인 해보시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이에 김 총장은 흔쾌히 대답하며 자기가 직접 전화 할 테니 전화 번호를 달라하여 자세한 전화 번호를 적어 주었다. 이 같이 비밀리에 하기를 원했던 것은 해당 보안사 장교가 본인에게 발설하지 않을 것을 약속 해 달라며 정보를 주었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당시 땅굴에 대해 긍정적인 말을 하는 장교는 반드시 불이익을 당한다는 분위기였기 때문이었다. 그 후 몇 일이 지나서 그 보안사 장교로부터 항의의 전화를 받았다. 상급자로부터 크게 꾸지람을 들었다는 것이었다. 김진영 대장은 아마도 고의로 비서실을 통해 해당 보안사 장교에게 전화를 걸어 꾸지람을 하도록 했던 것 같다. 이와는 별도로 상황이 심각한지라 본인은 당시 국방부 차관(권영해)에게도 땅굴 관련 사항을 알렸다. 보고를 받자 권 차관은 차관 보좌관에게 그 날밤 즉시 행주산성에 가서 땅굴 징후를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그런 후 오후 늦게 다시 취소한다는 연락을 본인에게 해 왔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후 얼마 않되어 최세창 장관은 본인에게 국방과학 연구소로 돌아갈 것을 명(후평리 땅굴 시추작업 진행 중)하여 본인은 사임하고 대우그릅 기조실 부사장으로 옮겼다. 이 얼마나 불가사의한 일인가? 대우에 근무하고 있었던 중에도 정지용씨는 중요사항을 가끔 본인에게 알려 주었다. 한번은 의정부 지역에서 일어난 일을 알려 주었다. 즉 그 지역의 한 주민이 자기집 밑에서 요란한 기계 소리와 진동이 있다고 신고 했다 고 한다. 여러 경로를 거처 당시 안기부 직원이 그 곳에 와서 확인까지 하게되었다고 한다. 그 내용은 땅 속에서 "빨리 빨리 타라우, 밥먹으러 가자우" 등의 말을 안기부 직원이 직접 듣고 갔다 고 했다. 본인은 이를 직접 확인하고자 당시 안기부 특보로 있던 모 후배에게 권영해 당시 안기부장에게 이 사실을 확인해 보아 달라고 부탁했다. 얼마 후 그와 전화를 통해 보니 그런 보고를 안기부장이 직접 받았다고 했다. 그 후에도 안기부의 반응은 전혀 없었다. 북한의 남침용 땅굴을 찾거나 이에 대해 긍정적인 관리(군 장교 포함)들은 불이익을 당하거나 모두 제거되는 상황이었다. 참으로 놀라운 김일성의 대남 적화통일 노력의 결과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땅굴 1개 축선을 완료하는데 수 억불씩 투자되고 장기간 소요될 뿐 만 아니라 한 번 발견만 되면 무능화 될 수 있는 것인데 이를 보호하기 위해 김일성이 얼마나 주도 면밀한 계획을 세우고 이를 자신했겠는가? 그것은 6.25이후 구축해 놓은 강력한 간첩망임에 틀림 없을 것이다. 과거 냉전시대 쏘련과 민족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영국,독일 등에서 장관급 이상의 거물 급 간첩들이 많이 체포 되었고 월남전 당시 월남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월맹의 간첩이었고 레바논 의 제마일 대통령 자신이 대통령 되기 전까지 미국 CIA 봉급을 받고 있던 첩자가 아니었던가? 우리는 남,북이 같은 민족이어서 간첩 침투가 쉬웠음에도 남한에서는 단 한명의 거물급 간첩이 체포된 일이 없지 않은가? 이 또한 김일성의 놀라운 노력의 결과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2. 김정일의 예상되는 통일 전략 가. 1국 2 체제 김 일성이나 김 정일의 한반도 적화 통일 의지는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이들이 두려워 했던 것은 미군이 아니라 통일 후의 "남한 민족을 어떻게 통치할 수 있을 것인가"였다고 한다. 김일성 체제를 남한에 강요하려면 수 백만 명을 사살해야 할 텐데 이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게 생각 했을 것이기 때문 이다. 이런 이야기는 조총련 고위 간부를 통해 전해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대우가 북한에 들어가 건설사업 하다가 중간에 쫓겨 나온 이유도 우리의 건설 기사들이 그들 작업자들(대부분 인민군)과 자주 접촉을 하게 되면서 자연 자유주의 사상이 그들에게 전파되게 되었고 이런 분위기를 직감한 김 정일이 김 일성에게 건의하여 작업이 중지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소한 일로 그들의 원대한 목적인 적화 통일을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1992년 김정일은 김일성에게 남한을 공격하자고 건의(황장엽씨의 말) 했었을 것이다. 김일성 사망후 김정일은 자연히 독자적인 통일 구상을 하게 되었을 것이며 중국의 1국 2체제를 머리에 떠올리게 되었을 것이다. 이는 명분상 중국을 납득 시키는데 가장 합당할 것이며 김정일의 1차 중국 방문시에 이미 합의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 이유는 북경 주재 북한 대사가 당시 북-중의 정상간의 의제를 1국 2 체제(물론 한반도)에 관한 것이었다라고 발표 했으며 중국은 자기들이 현재 홍콩을 그렇게 하고 있고 대만에 대해서도 1국 2체제하에 들어 오도록 강요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해 반대할 명분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전쟁은 원치 않는다는 것이 중국측 답변이었을 것이며 김정일은 이에 흔쾌히 응했을 것이다. 땅굴을 이용하여 한국군 및 주한 미군을 전쟁 없이 무장해제 시킬 수 있다고 김정일은 자신하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 땅굴을 이용한 김정일의 무혈 한반도 통일 씨나리오 김정일이 한반도 통일시기로서 가장 적절한 때를 아마 현 정권 끝나기 전일 것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김정일 주관하에 한국을 통일했을 경우 현 정권이 비교적 협조적일 것이라고 생각 할 수 있을 것이며 따라서 남한 사람들의 저항을 덜 받을 수 있어 통일 초기에 비교적 시민 살상을 덜 하고 남한을 진정 시킬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들이 항상 그렇듯이 공격 바로 전에 미국과의 관계개선이나 김정일의 답방 약속 등이 이루어 질 수 있을 것이며 평화 분위기를 최대한 부추긴 후 아마도 김정일의 답방 약속 일 전후해서 공격이 이루어 질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답방 후 금년 아시안게임이 끝나는 시점에 공격이 이루어 질 수도 있을 것이다. 늦어도 대통령 선거일 이전이 될 가능성이 높다. 땅굴은 총24개 이상 있는 것으로 정보보고 되어 있으며(연합사 및 국방백서) 현재까지 4개를 찾았으니 아직도 20여개가 남아 있을 것이다. 1개 축선당 20개의 출구만 가정해도 총 400개의 출구가 예상되며 30분이면 1개 출구당 최소 500명씩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공격개시 1주일전 까지는 땅굴 출구를 2-3m남겨 놓고 굴착작업을 완료한 후 병력수송이 이루어 질 것이다. 갱차를 이용하여 수송될 것이기 때문에 사천지역까지 내려 가는 데는 2일 정도 소비될 것이며 개인화기로는 소총과 기관총 정도가 될 것이다. 새벽 0시부터 약 1-2시간 동안 마지막 출구를 관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는 많은 소음이 예상되므로 아마 휴일을 이용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땅굴로 나오는 병력은 1시간 이내에 특수군 10만명과 일반 보병 10만명 정도로 합계 20만명 정도가 될 것이며 이들은 잠자고 있는 한국군을 간단히 무장 해제시키고 미군은 부대에 연금시켜 2-3시간 이내에 상황은 끝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탱크 등 중장비는 땅굴로 나올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이미 예행 연습한 바 대로 대형 화물선으로 남해안 및 동서해안으로 해군의 저항없이 무사히 상륙할 수 있을 것이다. 군사작전이 완료되는 대로 김 대통령으로 하여금 통일 선언문을 TV에서 낭독케 하고 대외적으로 한반도는 합의 통일 되었음을 선포한다. 그리고 미국은 한반도 국내 문제에 간섭하지 말 것을 촉구하며 미국이 한반도 문제에 개입치 않을 경우 우방국 대우를 보장하며 미군포로를 합의 처리할 것이나 만약 군사적으로 개입할 경우 미군 포로를 모두 살상할 것이며 접근하는 미 항공모함은 장거리 유도탄에 의한 원자탄 공격을 받을 것이라고 위협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결국 미국은 자존심을 상하지 않는 범위에서 김정일과 타협하게 될 것이며 이로써 대한민국의 운명은 끝나게 될 것이다. 안타깝도다! 단군이래 처음으로 춘궁기를 면하고 배고픔을 면하며 선진국과 어깨를 겨누려 하던 이 시기에 이런 억울함을 당하다니! 과연 누구의 잘못인가? 누구의 잘 못도 아니다. 4600백만 한국민의 잘못일 수 밖에 없다. 이조 시대부터 국방을 남의 나라에 의지하며 살아왔던 한민족이 아니었던가? 지금도 우리의 국방을 송두리채 미국에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과연 우리민족은 이럴 수 밖에 없는 것인가? 3. 결언 가. 김 정일의 신념 안보는 국가가 유지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안보를 중국에 의지하고 있던 이씨 조선의 말로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는가? 작금의 안보 상황은 이조시대(또는 베트남)의 그것 보다도 훨씬 위태롭다. 안보 불감증에 걸린 가엾은 국민은 국가안보를 미국에 의지하고 현 정권은 전략물자 및 군수품(달라 및 쌀 등을 조건없이 지원)등을 적에게 넘겨주는가 하면 국경선 마저 적에게 양보하려 하고 있지 않은가? 땅굴을 은폐하며 적의 공격을 유도하는 이런 무리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세계 역사상 그 유예를 찾아 볼 수 없는 역적 집단이 아닌가? 이조시대의 역적 이완용인들 이보다 더 할 수 있겠는가? 과거 냉전시대에 공산권 국가끼리도 자국의 국경선 유지를 위해 군사적 충돌까지 하지 않았는가? 우리의 현재 안보상황은 문자 그대로 풍전등화이다. 김정일은 한반도 통일 준비가 모두 완료 되었다.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중국과도 명분상 합의가 되어있는 상태일 것이고 무혈 통일의 수단인 땅굴은 간첩들에 의해 안전하게 지켜지고 유지되고 있다. 설혹 민간인들에 의해 땅굴이 발견된다 해도 걱정할 것 없다. 남한 정부와 국방부가 막아 줄 테니까? 김정일은 자신이 베트남의 호지명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가슴 벅차 있을 것이다. 결코 루마니아의 차우세스크는 되지 않을 것이다. 북한 경제가 파탄되고 주민이 굶주려 가며 온갖 국제적인 비난을 모두 감수해 가며 통일 일념으로 노력해 왔는데 이를 결코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기대에 가슴 부풀어 있을 것이다. 오직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나. 위기를 벗어날 방법은 없는가? 국가의 운명이 추풍낙엽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과감한 조치가 필요하다. 남침용 땅굴의 무능화는 필수조건이다. 핵 무기는 2차적인 문제다. 먼저 현재의 비무장 지대 넓이 4km를 20km로 넓히고 상호 감시를 즉시 실행토록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북쪽의 땅굴 입구를 봉쇄해야 한다. 만약 이에 응하지 않을 경우 한 톨의 쌀이나 한 푼의 돈도 주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김정일이 이에 응하겠는가? 반세기에 걸처 모든 희생을 무릅쓰고 이루어 놓은 적화 통일 수단을 쉽게 버릴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선제공격 밖에 없다. 선제공격으로 북쪽의 땅굴 입구를 점령하여 이것들을 모두 무능화 시켜야 돨 것이다.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는가? 물론 가능하다. 적은 이미 남한을 침략한 것이다. 땅굴이 남한을 깊숙이 뚫고 들어 왔다는 것은 이를 증명해주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우리의 선제공격은 정당 방위인 것이다. 법적으로 타당하다. 또한 적의 지상군은 우리와 정면 대결할 경우 전력 면에서 열세일 것이며 우리 군 앞에 쉽게 투항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도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잔학 무도한 폭정에 염증을 느끼고 있을 테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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